영화 Bicentennial Man(1999)은 인공지능 로봇 ‘앤드류’가 단순한 가사도우미로 시작해 200년에 걸쳐 인간성을 탐구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을 다룬 SF가 아니라, 감정, 창조성, 정체성 같은 철학적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룬다. 특히 2024년 현재, 로봇과 인간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Bicentennial Man은 "과연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진다.
로봇의 인간성, 기술을 넘어선 감정의 영역
앤드류는 처음에는 단순한 가정용 로봇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예술을 배우고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 가족들과의 교감을 통해 슬픔, 기쁨, 사랑 같은 복잡한 감정을 체험하게 되고, 점점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로봇'이라는 설정이다. 2024년 현재 AI 기술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감정을 분석하는 수준에 도달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앤드류의 여정은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기능적인 존재를 넘어, 존재의 이유와 죽음의 의미까지 고민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영화는 로봇이 감정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감정이 ‘진짜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관객은 앤드류를 보며 자연스럽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앤드류는 자신을 만든 회사에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개조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외형부터 시작해, 결국은 내부 장기까지 인간처럼 바꾸게 된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과 동일한 수명을 선택하며, 기술적 불사의 능력을 버리고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선택을 한다. 이는 매우 철학적인 장면이다. 인간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유한성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앤드류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이 되고, 그의 인생은 마침내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이 장면은 인공지능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한계까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AI 윤리와 자율성 문제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룬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현재 AI 기술은 자율주행, 감정 인식, 창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을 모방하고 있지만, ‘자기 존재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선택하는 능력’은 아직 이르지 못한 영역이다.
AI와 인간의 경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
Bicentennial Man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회귀한다. DNA나 생물학적 조건이 아닌, 감정, 관계, 죽음, 기억 같은 인간만의 요소들을 로봇이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2024년 지금, GPT와 같은 AI는 시와 음악을 창작하고,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한다. 로봇은 병원, 가정, 산업현장에서 점점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앤드류의 여정은 그저 허구적 상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기술을 넘어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앤드류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허가를 받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고 실수하며 늙어가는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깊은 울림이다.
Bicentennial Man은 감정, 자유의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로봇을 통해 인간성을 정의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AI SF물이 아닌, 철학적인 선언이며,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기계에게 인간이 될 권리를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앤드류의 여정은 우리에게 감정이 기술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