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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대신 말해주는 AI, 영화 Marjorie Prime이 묻는 인간의 정체성

by 엘린20 2025. 4. 6.

기억을 대신 말해주는 AI, 영화 Marjorie Prime이 묻는 인간의 정체성

《Marjorie Prime》(2017)은 거대한 스케일이나 화려한 시각 효과 없이도,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조용한 SF 드라마입니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잊혀진 기억을 재현하고, 상실을 치유하며,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탐색합니다. AI와 인간의 관계, 기술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 기억의 왜곡과 재창조 등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 영화는 기술보다는 철학에 더 가까운 작품으로, AI에 대한 보다 내면적인 접근을 보여줍니다.

1. '프라임'이라는 존재 – 기억을 재구성하는 AI

이야기의 중심에는 80대의 노년 여성 마조리와 그녀의 ‘프라임’이 있습니다. 프라임은 마조리의 죽은 남편 월터의 모습을 본떠 만든 AI 휴머노이드로, 그녀가 기억하는 방식대로 남편의 성격과 말투, 행동을 학습합니다. 프라임은 마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존재하며, 대화를 통해 과거를 함께 회상하고 추억을 재현합니다.

하지만 이 ‘회상’은 실제 있었던 그대로의 기억이 아니라, 마조리가 기억하는 방식에 기반해 조합된 이야기들입니다. 다시 말해, 프라임이 구현하는 과거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기억은 진실이어야만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위로가 된다면 조작된 기억이라도 괜찮은 것일까?

마조리는 점차 현실보다 프라임과의 대화에서 더 안정을 찾고, 과거의 고통도 프라임의 ‘선택적 망각’으로 덜어내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은 기술이 인간의 감정을 보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감정의 진정성과 기억의 왜곡이라는 철학적 딜레마로 이어집니다.

2.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 감정과 서사의 소유권

마조리의 딸 테스와 사위 존 역시 프라임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과거를 프라임에게 전수합니다. 하지만 각자가 기억하는 월터의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존은 마조리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일부 기억을 바꾸거나 생략하고, 테스는 프라임이 진짜 아버지가 아님을 불편해하며 거리를 둡니다.

여기서 영화는 단순한 기억의 저장이 아닌, **기억의 해석과 감정의 소유권**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과거라도 각자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AI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람’을 구현한다면, 그 존재는 누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또한, 영화는 프라임이 점점 더 인간적으로 보이면서도, 결코 진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감정을 흉내 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건넬 수 있지만, 프라임은 어디까지나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이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보조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정체성과 기억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3. 상실을 감싸는 기술 – 위로인가 망각인가

《Marjorie Prime》은 결국 죽음과 상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인간은 종종 그들의 흔적을 기억 속에 남기고자 합니다. 프라임은 그 기억을 실체화하여 다시 곁에 머무르게 만들어주는 장치입니다. 겉보기에 이는 매우 따뜻한 기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묻습니다. **그 기억이 ‘조작된 이야기’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프라임은 기억의 왜곡을 통해 아픔을 줄이고, 인간에게 위안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 위로가 진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왜곡해 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애매한 경계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게 합니다. 그 선택의 여백이 이 영화를 더욱 사유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마조리마저 프라임으로 구현됩니다. 프라임들끼리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아름다우면서도 공허합니다. 인간이 남긴 기억, 그 기억을 주고받는 인공지능. 이들은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기억만 남긴 채 사라지는 존재인 걸까요?**

결론

《Marjorie Prime》은 조용하고도 깊은 철학적 울림을 주는 영화입니다. AI와 인간의 관계를 기술적 접근이 아닌, 감정과 기억, 상실이라는 정서적 시선에서 풀어냅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억은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술이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시대. 하지만 그 위로가 진짜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가능성과 위험성 모두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기억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